제국의 역사/로마 제국의 역사

로마 공화정의 역사(3) - 나라의 운명을 건 삼세판 승부 로마 VS 카르타고 <포에니 전쟁> (상)

Master L(마스터 리) 2022. 3. 25.

로마 공화정의 역사(2)- 포에니 전쟁(상)

오늘은 지난 포스팅에 이어 로마 공화정의 운명을 건 약 120여년 간의 전쟁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전쟁을 어떻게 120여년을 하냐고? 고대니깐 가능한 일이었다.) 

로마의 역사는 동로마를 이은 비잔티움 제국까지 합치면 거의 2000여 년이다.

120여 년은 로마의 역사에서는 길지만 짧은 기간일 수 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자.

 

1. 포에니 전쟁의 배경 (도대체 왜 싸운 거냐 너희들)

 

전쟁의 역사는 정말 쉽고도 어렵다. 

전쟁을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모두 알다시피 자신의 국가에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또는 군사적 동맹 간의 의리 때문도 있다.

오늘 설명 할 포에니 전쟁도 처음에는 이러한 이유로 시작되었다.

 

자. 지도를 먼저 보도록 하자.

지금의 이탈리아 반도를 영향권에 둔 로마 vs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를 영향권에 둔 카르타고

로마는 기원전(B.C) 약 280년경 이탈리아 반도를 거의 점령하고 영향권에 두었다.

 

이후 로마는 지금의 프랑스 남부와 코르시카, 사르데냐 섬

그리고 1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장 사르데냐를 정복하기 위하여 군사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렇게 주변의 부족들을 점령하고 동맹관계를 체결하며 성장하던 로마에게

아프리카와 지중해의 맹주 카르타고가 도전장을 내민다.

 

카르타고와 로마의  결정적인 전쟁 원인은 바로 로마가 시칠리아를 무단 점령한 것이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반도 옆 파란색과 노란색으로 칠해진 부분이다.)

 

왜 그게 싸움의 원인인가?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주요 무역 거점이었다.

지중해를 통해 카르타고로 들어오는 모든 무역품은 시칠리아를 한번 거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르타고의 입장에서 절대 잃으면 안 되는 주요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걸 포기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원래 거주하고 있던 부족을 동맹으로 삼아 무역 거점을 유지 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로마라는 놈들이 자신의 무역거점을 무단 점령해 버린 것이었다.

(당연히 카르타고의 입장에서 화가 날 수 밖에.)

 

2. 본격적인 전쟁 시작. (해상 강국 VS 육상 강국)

포에니 전쟁 시작 전 카르타고는 지중해의 맹주였다.

무슨 말 이냐면 카르타고는 지금으로 치자면 거의 미국급의 해군을 지닌 나라였다.

(엄청나게 강한 해군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로마는 해군으로 카르타고의 해군을 상대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의 독재관은 해상전 대신 육상전을 많이 택하였다.

(시칠리아 거점 방어전.)

 

따라서 초반 10년 동안 전쟁의 상황은 거의 전선의 변화 없이 교착상태로 진행 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의 주요 전장은 시칠리아 섬이었다. 

로마 육군이 시칠리아섬을 방어하면, 카르타고의 해군이 다시 도시를 뺐는 그런 양상으로 전투가 진행되었다.

(빼앗기면 다시 빼앗는 양상.)

 

그렇게 전투가 길어지자.

결국, 로마는 한 가지 결단을 내리게 된다.(로마이기 때문에 가능한 결단?)

바로 해군이 약하니 해군을 강화 하자는 것이다.

뭔 개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로마니까 가능한 얘기이다.

 

로마는 앞선 포스팅에서 설명하였지만, 선진 문물을 아주 잘 수용한 나라였다.

따라서 포에니 전쟁 당시 여러 부족에게 조선을 배우고 해군 전법을 배워 로마 만의 해군으로 해군을 재편하였다.

(그 당시 선진 문물 수용은 희귀한 일이었다.)(자신의 전통을 버리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로마는 해군의 비밀병기 코르부스(까마귀)를 활용한다. 

코르부스(까마귀)의 작동 모형

코르부스(까마귀)는 쉽게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로마 해군은 그들의 배에 적들에 배에 승선 할 수 있도록 기다란 기둥과 같은 접철식 다리를 수송하였다.

(해상 위에서 다리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로마의 해군은 카르타고의 배 옆에 접근한 이후 그 접철식 다리를 카르타고의 해군 배에다 꽂아버렸고,

이후, 로마의 숙련된 군단병들이 다리를 건너 카르타고 배에 올라타 백병전을 벌였다.

이렇게 되면 바다 위에서도 육상전을 펼칠 수 있는 로마군의 완전한 우세 환경이 만들어지게 된 것 이었다.

(앞서 설명했듯 육상에서의 전력은 로마군이 한 수 위였다.)

 

이 전술을 통하여 로마군은 카르타고 해군의 강점이었던 항해 전술을 완전히 무력화 시킨다.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의 해상 전투 상상도 위쪽이 로마군 아래쪽이 카르타고 군

이렇게 로마군은 육상 뿐 아니라 해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결국,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마무리 된다.

 

이 결과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막대한 양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여야 했고 시칠리아 섬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패배한 여러 부족들의 반란 등을 진압하며 지금의 스페인으로 영향력을 확대한다.

(전쟁에서 패배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지중해의 강대국이었다.)

2.  두 번째 전쟁. 세기의 명장 등장 그러나 상대도 세기의 명장?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면 영웅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시기가 하필.. 

 

카르타고는 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히스파니아의 집정관이자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가 아버지에 이어 군사권을 잡는다.

(1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의 아버지는 군사 지휘관이었다.)

한니발 바르카- 세기의 명장

카르타고는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에서 철수 한 이후 지금의 스페인인 히스파니아에서 영향력을 넓혀간다.

(시칠리아를 거의 포기 했으니, 카르타고 입장에서는 히스파니아(스페인)를 당연히 사수 하여야 했다.)

(한니발은 이러한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집정관이었다.)(히스파니아 속주의 총군사령관)

 

그러나 로마가 당연하게도(?) 이를 내버려 둘리 없었다.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 원주민 부족들과 동맹을 체결하며 카르타고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당시 카르타고의 지휘관이었던 한니발은 로마와 동맹관계였던 히스파니아 부족의 도시 사군툼을 침공한다.

(사군툼의 위치는 이러하다.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 해안 도시이자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해상 요충지였다.)

한니발은 당시 사군툼을 침공하면서 결심한다. 

우리 아버지를 죽인 로마인들을 짓밟겠다고, 로마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그렇게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면서,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 한다.

 

이후 한니발은 아주 공격적인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바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하는 것 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공격적인 전술.)(후에 나폴레옹이 한니발을 본받아 겨울에 러시아로 갔다는 속설이..)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는데

 

로마는 그 당시 여러 부족들과 동맹관계를 채결해 카르타고를 압박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니발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부족들과 전투를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무모한 알프스 산맥 행군 작전을 기획했다.

알프스를 건너 로마의 직접적인 영토 이탈리아 반도를 치는 것.

 

과연 한니발의 원정은 로마를 무너트렸을까?

알프스를 행군 한 한니발이 명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후 내용은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서 서술하도록 하겠다.

알프스 산맥의 전경. 한니발은 여기를 전투 코끼리를 타고 넘었다.

(한니발의 로마 원정 그리고 세기의 명장(한니발) vs 세기의 명장(스키피오)의 대결이 다음 포스팅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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