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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의 이야기: 알려지지 않은 그의 생애를 알아보자"

Master L(마스터 리) 2024. 2. 18.

안녕하세요, 오늘은 우리 역사의 빛나는 인물, 강감찬 장군을 소개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KBS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최수종이 연기하며 핫한 인물이기도 하죠.


지금 바로 강감찬 장군 만나봅시다.

KBS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속 강감찬- 최수종 연기
KBS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속 강감찬- 최수종 연기

 

 

이 포스트에서는 강감찬 장군의 생애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어린 시절 이야기

 

강감찬, 그의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이었습니다.(모르던 사실이죠?)

 

강감찬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입니다. 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장군 강이식으로 그의 조상은

진주 강 씨입니다.

강감찬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입니다.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에서 금천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강감찬을 낳았습니다.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도 전해집니다.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있는데,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이죠.

강감찬이 태어났을 때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강감찬이 태어났을 때 문곡성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강감찬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관직에는 영 운이 없었는지 983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입니다. 

2.관직 진출 그 후 이야기

 

그 후 1009년 강감찬은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 내용이 바로 드라마 고려거란 전쟁 속 나오는 내용입니다.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즉위에 올리는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즉위에 올리는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

 

 

이후 요나라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는 제2차 고려거란전쟁이 발발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갑니다.

 

강감찬은 2차 고려거란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려가 3차 고려거란전쟁에 대비할 힘을 가지도록 큰 영향을 끼칩니다.

 

 

 

 

3. 문신이지만 무관으로서의 활약들

 

 

1012년(현종 3년)에는 동북면행영병마사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쌓았던 군경험이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동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된 강감찬
동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된 강감찬

 

 

이때 감찰어사 이인택이 강감찬은 문관인데 왜 무관직에 강감찬을 임명하냐는 탄핵을 했으나 현종은 도리어 이인택을 파직합니다.

 

이는 강감찬이 현종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실입니다.

 

1014년(현종 5년)에는 중추사로 임명되어 사직단 수축을 주장하였고, 1016년(현종 7년)에는 이부상서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1018년(현종 9년) 5월에는 강감찬은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거란의 대규모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인물로서의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내사시랑 평장사에 임명되었을 때 현종이 직접 임명교서를 써 주었으며, 이는 매우 큰 영예로 여겨졌습니다. 

 

현종이 이렇게 친히 교서를 써서 강감찬의 공적을 찬양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강감찬은 거란의 3차 침략 2달 전 10월에는 서북면행영도통사가 되어 사실상 군사의 전권을 받았습니다.

 

그해 12월에는 거란의 소배압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는 제3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죠,

 

강감찬은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귀주대첩이 일어난 당시를 표현한 그림
귀주대첩이 일어난 당시를 표현한 그림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청야전술과 유격 전술, 그리고 귀주 대첩에서의 망치와 모루 전술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거란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4. 귀주대첩 이후 강감찬의 삶

 

강감찬은 귀주대첩 이후 현종에 의해 많은 영광을 받았습니다. 현종은 귀주에서 개선하는 강감찬을 영파역까지 마중 나가서 공을 치하했고, 강감찬은 이에 감동하여 사의를 표했죠. 

 

그리고 현종은 개선 연회가 있었던 영파역의 이름을 흥의역으로 바꾸게 했습니다. 

 

이는 강감찬의 공적을 인정하고 강감찬을 기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강감찬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했지만 궤장을 하사 받았습니다. 또한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강감찬은 공신호를 받았으며, 수도 개경의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습니다. 

 

석탑에는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후 강감찬은 1030년에 문하시중으로 승진하였으며, 1031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84세였으며, 현종이 죽은 지 3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강감찬은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귀주대첩을 지휘한 고려군 총사령관 강감찬
귀주대첩을 지휘한 고려군 총사령관 강감찬

 

 

이상으로 강감찬의 생애이야기를 소개하였습니다. 

 

강감찬의 공적과 헌신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저 또한 강감찬 장군이 세운 업적에 감탄하게 되네요, 이상으로 포스팅 마치겠습니다.

 

이미지 출처-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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