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국가의 역사/한국의 역사

한국(5)- 집안 싸움이 가장 살벌하지 안 그래? (백제의 전성기 이야기)

Master L(마스터 리) 2022. 3. 31.

(지난 포스팅을 보고 오시면 더욱 쉽게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신라의 탄생에 이어 본격적인 삼국의 한반도 전쟁의 역사에 대해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1. 삼국이 전쟁을 시작한 이유

도대체 왜 삼국은 전쟁을 시작했을까? 이러한 의문이 들 것이다.

 

처음에는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1. 왕권 강화

2. 비옥한 농경지 확보

 

처음 삼국의 왕들은 전쟁을 통하여 주변 부족들을 정리하여 자신의 통치체제를 확고하게 하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연유였다. (연맹 체제에서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하는 과정)

 

이러한 이유도 있었지만 삼국이 본격적인 전쟁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밥이다.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농경국가였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비옥한땅을 확보하는데 주력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밥심이다.

따라서, 삼국은 비옥한 농경지 확보를 위해 본격적인 정복 전쟁에 뛰어들었다.

 

또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을 한 곳으로 모으기 위해서는 내부의 적을 두지 않고,

외부의 적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전쟁의 목표 생성)(사기 진작)

 

또한, 중앙 집권적인 군주제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적을 소탕하는 내전과

밥을 먹기 위해 농사를 지을 땅을 최대한 많이 확보 할 수 있는 정복 전쟁의 수행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따라서 당시 삼국의 왕들은 군사적 능력을 얼마나 뛰어나게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필수 덕목이었다. 왕이 되려면 훌륭한 지휘관이 되어라!!

 

그렇게 삼국시대는 왕권이 안정화 되면,

다른 나라의 농경지들을 차지하고 땅을 뺐고 빼았기는 전쟁 활동을 개시했다.

 

그렇다면, 오늘은 삼국 중 가장 먼저 왕권을 안정시키고,

정복 전쟁 활동을 개시한 백제의 근초고왕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2. 가장 먼저 한반도를 호령한 백제의 근초고왕 그 정복의 역사

근초고왕! 역사 시간 졸지만 않았다면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삼국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왕들 중 유명한(네임드) 왕이다.

백제의 제 13대왕이자- 백제의 부흥을 이끈 왕이다.

그는 체격과 군사적 능력 모두 뛰어난 왕이었다. (그는 사실 둘째 출신 왕이다.)(서자였다.)

그의 제위기간은 약 30~40년 사이로 추정된다. (앞서 말했듯 군사적 능력이 출중한 왕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보통 형제끼리 왕위를 상속하는 집안 연장자 상속제를 중심으로 왕위가 상속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왕권이 안정화되기 이전까지 이렇게 상속했다.)

 

그러나 근초고왕은 이러한 전통을 깨고 왕위에 올랐다.(비하인드 스토리)

(아마도,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내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그는 이러한 전통을 박살내고, 자신의 어린 큰 아들을 태자로 삼는 장자 상속제로 체계를 바꾼다.

(여기서는 짧게 설명했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치는데 약 20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후, 그는 엄청난 권력과 힘으로 백제의 모든 군 통수권을 거머쥐게 된다.

이렇게 그는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백제를 발전시킨다.

 

또한, 백제가 이렇게 정복 활동을 개시 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인 역할이 주요했다.

4세기 근초고왕 이후 백제의 정복 과정 출처- 에듀넷

백제는 현재 대한민국의 수도가 위치한 서울 근처에 한성을 세웠다.

(백제의 제1대 왕인 온조의 위치 선정이 아주 기가 막혔다.)

 

따라서 강을 통해 나라가 발전 할 수 있었고, 중국과 교류 하기도 아주 간편했다.

(교역을 하기 아주 간편하였다. 실제로 무역항을 지어 교류하였다.)

그렇게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할 수 있었고, 

한강에 있는 비옥한 농경지를 제일 먼저 확보하여 제일 먼저 발전 할 수 있었다.

 

(영토로 보면 고구려가 가장 크지만 알짜배기 땅은 백제가 가지고 있었다.)

(이후 삼국의 거의 모든 전쟁은 이 한강 유역에서 발생한다.)(전략적 요충지)

 

20년 동안 체제를 안정화시킨 근초고왕은 정복전쟁을 개시한다.

 

근초고왕은 먼저 지금의 전라북도에 있던 마한의 소국들을 정리한다.

(지금의 전라남도까지 점령했다고도 전해진다.)(불분명한 사실이므로 여기서 끊는다.)

 

이후, 백제의 수도가 되는 공주 유역의 금강을 점령하고, 

또한 철제 무기를 중심으로 연맹국가였던 가야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근초고왕 때 백제는 외교 수완 또한 탁월하였는데 

 

당시 중국의 왕조였던 동진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교역하였다. 이를 통해 부를 축적했다.

또한 일본의 야마토 정권과도 교류하였는데,

이때 백제가 야마토 왕조의 천황에게 수여하였던 물품이 바로 칠지도이다.

칠지도 출처-위키피디아

 

그래서 고구려랑 전쟁은 언제 하냐고? 

(지금부터 서술하겠다. 미안하다.. 서론이 길었다.)

3. 고구려와의 집안싸움 시작 그 결과는?

당시 고구려의 국왕은 고국원왕이라는 왕이었다.

고국원왕 당시 고구려는 농경지 확보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국토는 큰데 쓸 땅은 거의 없었다.)

 

당시 위례성 위쪽의 치양 북부와 평양성을 고구려가 확보하고 있었다.

고국원왕은 결단하여 이대로는 다 굶어 죽겠으니, 백제를 먼저 쳐서 한강 유역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선수를 친 것이다. (그는 전쟁에서 이미 한번 패배하였다.)(중국 전연의 침입)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분쟁지역 위례성-치양성-평양성 일대

그렇게 고국원왕은 농경지 확보를 위해 약 20,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백제의 치양성을 점령하려 한다.

(밥을 먹기 위한 노력.. 안타깝다.)(이번에도 상대를 잘 못 만났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자신의 큰아들인 태자 부여수(근구수왕)에게 고국원왕의 병사에 1.5배 정도인

약 30,000명의 병사를 주어 격퇴시킨다. 서기 369년의 일이었다.

 

고국원왕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병사의 절반을 잃고 평양성에서 재정비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백제가 기세를 몰아 근초고왕이 태자와 함께 거병하여 3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공성전을 벌인다. 근초고왕에 맞서 평양성 수성전을 지휘하던 고국원왕은 

어느 한 병사가 쏜 화살을 맞고 전사하게 된다.

 

(비하인드 스토리로 원통하게 죽었다 해서 시호가 고국원왕이라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국원왕에 원은 근원 할 때 원이다.)

눈 먼 화살에 전사했다고 알려지는 고국원왕 비운의 왕이다.

그렇게 근초고왕은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고 평양성을 거의 함락시킬 뻔한다.

(실제로 함락했다는 전과도 있지만 불분명하다.)

 

그렇게 고국원왕의 전사 이후, 백제와 고구려는 동명왕(주몽)이라는 같은 뿌리를 가진 왕조이지만,

서로 미워하는 철천지 원수 사이가 된다. 고구려는 이 전투 이후 백제라는 나라를 잔인할 잔(殘) 자를 붙여

백잔으로 부르는 원수 지간이 된다.(이것은 나중에 스노우볼이 되어 똑같이 돌아온다.)

 

그렇게 본국으로 돌아온 근초고왕은 새로 정복한 땅들을 정비하고 성을 축조하던 중 숨을 거두게 된다.

이후, 백제는 태자인 근구수왕이 왕위를 이어받아 장자 상속제를 확립한다.

 

오늘은 백제의 정복 군주 근초고왕과 삼국이 전쟁을 왜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았다.

다음 포스팅에는 백제 이후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오늘도 좋은 정보가 되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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