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국가의 역사/한국의 역사

한국(6)- 정복 그리고 또 정복 고구려의 위대한 정복 군주 이야기

Master L(마스터 리) 2024. 1. 7.

(지난 포스팅을 보고 오시면 더욱 좋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아마 우리 역사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력했던 국가였던 고구려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 (고려)

고구려의 대표 상징인 삼족오

 

삼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국가이자 여러 유목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인 고구려

 

 

고구려의 가장 위대한 점은 전쟁을 현대인인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매우 그리고 자주 전쟁을 치르는 

 

우리 역사상 가장 호전적인 유목민족이 세운 우리 국가였죠

 

오늘은 그런 고구려의 시작과 전성기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합시다.

 

고구려 건국의 아버지 동명성왕 (우리에겐 흔히 주몽으로 알려져있다.)

 

고구려의 첫 번째 시작은 지난 포스팅에서 설명하였던 동명왕의 탄생설화에서 시작됩니다.

부여에서 떨어져 나온 주몽의 세력이 졸본이라는 지역에서 토성을 쌓고 부족국가를 만들었다.

이것이 지금의 고구려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죠. 

 

그렇게 동명왕이 세운 고구려의 후손들은 우리 역사에 발자취를 남기기 시작합니다.

 

그 중 우리는 고구려의 가장 찬란했던 시기를 이끌었던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정복 군주 광개토대왕에 대해 알아 봅시다.

 

 

1.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사나이 광개토 대왕

5세기 무렵 고구려의 최전성기 시절 지도
위 지도는 5세기 무렵 고구려의 최전성기 시절 지도이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광개토대왕 이야기를 이번시간에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광개토대왕(374~412·재위 391~412)

 

 4세기말부터 5세기초까지 고구려를 이끈 강력한 정복군주 광개토대왕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이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서기 384년 11월, 고담덕의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승하하자 왕의 동생이자 담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즉위했다. 이에 따라 담덕은 그로부터 2년 뒤인 고국양왕 3년에 12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6년 뒤인 서기 391년 5월, 고국양왕이 죽자 담덕은 고국양왕을 계승해서 18세의 어린 나이로 고구려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백제와 연나라의 위세가 굉장히 대단하였다.

라고 서술합니다.

광개토대왕의 즉위무렵 한반도 부근
광개토대왕의 즉위무렵 한반도 부근의 정세-출처 나무위키

 

백제는 한강유역을 기반으로 고구려의 평양성 부근의 평야를 압박하며 견제하며 국지전을 유발하였고,

한반도의 패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또한 요동반도 쪽의 연나라는 선비족이 세운나라였는데 요동반도와 화북지역을 점령하며 고구려의 영토부근을 계속해서 압박하는 상황이었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의 광개토대왕은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나갈까요?

 

2. 광개토대왕의 복수 그리고 전설의 시작- 백제 정벌이야기

 

광개토대왕은 즉위 즉시 태자시절 생각해 오던 것들을 실천하기 시작하였는데

즉위한 지 2개월 만에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를 정벌하러 직접 출정합니다.

 

이 출정으로 백제의 성 10개와 한강 이북의 부락들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는 대승을 이끕니다.

또 백제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관미성을 그의 군사적 능력을 활용하여 점령합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활용하여

백제의 당시 왕이었던 진사왕이 그를 두려워하여 겁을 먹어 싸우지도 못하고 도망치게 합니다.

 

이후 백제의 왕이었던 진사왕은 갑작스러운 이유로 급사하게 되죠.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진사왕은 쿠데타를 통해 왕이 되어 정통성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백제의 신하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정통성이 부족한 왕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전쟁 수행능력을 핑계로 갈아치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백제의 비운의 아이콘이자 근성왕 아신왕이 즉위하게 됩니다. 

아신왕은 재위 이후 몇년간 광개토대왕과 수십차례 전쟁을 하게 됩니다.

 

광개토대왕의 백제 공격은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그는 급선무로 북방의 거란족과 선비족을 먼저 정리하기로 합니다.

 

즉위 1년간의 강렬했던 백제 공격 이후 남쪽 전선은 약 5년간 백제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수성전의 양상을 띄게 되는데 이 이유는 북방의 유목민족을 정리하는게 급선무였다고 광개토대왕은 판단했습니다.

 

 

3. 거란 북벌과 요동 정벌

 

그가 정복군주라고 불리는 이유로는 정말 쉬지 않고 정벌을 나선 군주라는 것입니다.

재위 초 고구려는 거란이라는 유목민족의 약탈로 정말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북방의 유목민족인 거란족
북방의 유목민족인 거란족 이후에 요나라를 세워 우리 한민족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14년 전인 소수림왕 8년(378년)에 거란이 고구려 북쪽 8개 부락을 약탈해 간 사건이 있었다. 이때까지 잡혀간 포로의 수가 10,000명에 달했다. 이를 통해 거란의 약탈에 의한 피해가 심각했음을 알 수 있죠.

 

즉위 1년 차인 9월에 광개토대왕은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에 포로로 잡혔던 고구려 백성들을 되찾아 오는 것과 더불어 거란족 500명까지 전쟁 포로로 사로잡아오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사실 광개토대왕 원년의 북부 전선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갔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았는데 태왕은 여전히 남부 전선에 머물러 있고 북부 전선에서는 다른 장수가 활약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의 업적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그는 즉위 6년이 될 무렵까지 북방의 유목민족을 토벌하는데 집중하였습니다.

 

4. 백제의 굴욕과 고구려의 한강 확보

고구려 육군의 한성 공성 경로

 

고구려 수군의 상륙 경로

 

재위 6년 무렵 광개토대왕은 그동안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에 연례행사처럼 매년 고구려의 영토를  침범한 것을 응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밀고 들어갔습니다.

수로와 육로 양면으로 진공 하여 미추성, 아단성, 대산한성, 고모루성 등 수십 개의 성이 무너지고, 백제의 수도(한성)로 압박해 들어갔죠

 

그때까지 함락된 백제의 성이 모두 58성에 700촌이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신왕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아신왕은 백제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어 응전하려 하였는데, 광개토대왕은 화가 나서 직접 고구려 군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 한성 공성전을 펼칩니다.

 

백제 군대가 격퇴되고 한성이 포위되기에 이르러 처지가 곤란해진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고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 필을 바치면서

'지금부터 태왕 폐하의 영원한 노객이 되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당당히 수도인 국내성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는 핑계 였다는 듯이 꾸준히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고구려는 백제의 한강 무렵 지배권을 완전히 무력화하였고 오히려 한강 무렵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과로였을까, 아니면 상처가 덧나서였을까, 죽기에는 아직 창창한 나이에 요절하고 맙니다.

 

2.광개토대왕의 평가와 의의

가장 중요한 정복군주로서의 면모를 살펴보아도, 광개토대왕은 독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사 전체를 살펴볼떄 이렇다 할 정복 전쟁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발해, 고려 조선 유목민족이었던 여진족을 토벌하는 수준이었으며,

시대적으로 팽창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허나 광개토대왕은 일생을 전방위적인 정복 사업에 투신했는데, 

한족중심의 국가가 없던 중원이 분리된 이합집산의 정복 국가시대라는 상황을 십분 활용하여

그 이상의 결과를 도출해 낸 것이었습니다.

 

이게 어찌 보면 기회주의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죠.

그러나 어차피 역사적인 업적이라는 것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런 기회를 타고나야 한다고 필자는 봅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게 이런 인물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한편,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은 오히려 일종의 국방 안정을 꾀하는데 도움을 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까진 그래도 강성한 백제와 후연이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하고 있었고, 주변 국가인 거란이나 다른 유목민족들도 고구려를 벼르고 있던 상황에서 정복 전쟁에 승리하고 이들을 미리 밟아놓은 덕에 백제와 후연 및 다른 중원 국가들도 당분간은 고구려를 정복할 생각도 못하게 되었죠.

 

즉, 고대사에서 정복 활동이 큰 의미인만큼 정복 활동의 업적과 동시에 국방 안정에 대한 업적도 나름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덕분에 아들 장수왕도 중원보다는 한반도 내부의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고,

고구려 내정을 정비하는데 힘을 쏟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군주 최초로 중국에서만 사용하던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고구려의 국력이 중국의 왕조에 버금갈 만큼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광개토대왕은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 표준영정. 1977년 이종상 작
광개토대왕 표준영정. 1977년 이종상 작

 

 

최고의 공격은 최고의 방어로 설명할 수 있는 안보의 아이콘 광개토대왕.

그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의 타이틀을 가지는데 손색없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결론 내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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